보호하여 구원하리라(열왕기하 19:29-37)

보호하여 구원하리라(열왕기하 19:29-37)

최고관리자 0 23 06.08 15:50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지난 한 주 큐티목회하시는 목사님과 새벽마다 기도했다. 늘 하던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으로 가정, 직장, 나라를 위해 기도했다. 구속사 간증의 큐티목회 현장이었고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실감나는 기도회였다. 대선 후에 드린 기도가 너무 시의적절했고, 기복보다 팔복의 가치관으로 회개하게 하셔서 감사했다. 말씀대로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100% 응답된 줄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게 있어서 “구원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한 것만 생각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것 같은 현실 앞에 실망하고 걱정한다. 오늘 하나님이 어떻게 보호하여 구원하시는지 생각해 보겠다.

## 1.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신다

29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히스기야가 산헤립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때, 산헤립을 갈고리를 코에 꿰고 재갈을 입에 물려 돌이키리라고 약속하셨다. 산헤립을 처단해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말씀만이 아니라 징조도 주신다. 말씀은 들려주시는 것, 징조는 보여주시는 것이다. 들은 말씀을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통해 확신을 주신다. 성경을 구속사로 들어야 한다. 징조의 내용이 무엇인가? 금년과 내년에는 밭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는데, 농사는 못 지었지만 밭애서 저절로 자라난 것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년에는 다시 농사져서 수확한 것을 먹게 한다고 하신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있는 것이다. 징조는 싸인이고 표지판이다.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이다. 그러면 이 징조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가? 지금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다. 지금은 성밖을 나가 농사 짓고 수확할 수 없다. 성안 창고에 저장한 게 떨어지면 먹을 게 없다. 이게 제일 큰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징조로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통장 잔고가 없다고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렸나 이러시면 안된다. 밭에 나가지 못하고 농사짓지 못하는 현실, 그렇지만 아직 굶어죽지 않고 살아있는 현실은 암담한 현실 자체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징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앗수르가 물러가는 기적만 징조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처해있는 이 고난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징조라는 것이다. 알맞게 통장잔고가 없었기에 열심히 교회에 나올 수 있었다. 우리의 성숙을 위해 기도를 천천히 답해 주시는게 하나님의 시간이다. 성안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현실, 농사 못 짓는 현실이 징조가 되어 가리키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30 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피하고 남은 자, 겪을 일 다 겪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이다.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에 놓인 사람이다. 남은 삶에서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숨만 쉬고 있는 사람이다. 다 잃은 사람, 다 떠나보낸 사람,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남은 자에게 “다시”가 있으리라고 하신다. 다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열매를 맺을지라고 하신다. 이런 회복이 어떤 소망도 남지 않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고 하신다. **이런 다시의 회복이 징조가 가리키는 목적지이다. 오늘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갇혀있는 현실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멸망이 아닌 “다시”의 회복인줄 믿는다.** 그만큼 이건 기적이죠. 우리 생각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기적을 약속하신다.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 말씀하신다.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31 …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여호와의 열심이 이런 기적을 이루신다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열심은 무엇을 잃지 않으려는 불타는 사랑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열심히 활활 타오르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열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뿌리를 주시고 다시 열매를 주신다. 다시 회복되는 기적은 우리 힘으로 얻는 게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정치인이, 기대하는 정책이, 의지하는 재력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시 회복되는 기적은 오직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가려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유일한 힘은 여호와의 열심이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기 때문에 오늘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뿌리를 잘 내리고 열매를 잘 맺을수 있는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 일을 모두 완료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말씀이다. 히스기야가 기도한 그 순간부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앗수르로부터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힘을 다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때 끝까지 주님을 찾는 주의 백성들을 사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능력을 다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이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적용질문1
내가 보고 싶은 징조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디에 갇혀있습니까?
갇혀있음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징조임을 믿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다시 거기에 뿌리 내리고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THINK 새벽기도회의 모든 강사님들이 다 훌륭하셨는데 특히 사모님들이 진심을 보여주셨다. 모두가 첫 번째로 하는 말이 “우리 가정이 살아났어요”다. 살아났으니 살아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사모님만 그런게 아니라 단 위에 서신 목사님도. 부부, 고부, 자녀간의 갈등을 있는그대로 나눠주셨다. 강사님들 중에서는 목사님 자녀가 거의 다이다. 그러니까 어려서부터 솔직하게 나누기 힘들었을 것 같다. ‘내가 목사 자녀인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본인이 살아났으니 어찌나 솔직하게 하시는지 도리어 우리가 더욱 분발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 사모님들은 그런 얘기하기 정말 어려운데 말이다. 여러분 가운데는 “왜 그런 일을 오픈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들이 쏙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큐티목회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그 솔직함으로 약재료로 성도님들이 살아나시겠구나’라는 한국교회의 소망을 보았다. 그리고 ‘큐티 목회는 사모님들이 정말 중요하구나’ 생각이 든다. 얼마나 솔직하신지 조금만 인용해 드리겠다.

한 분은 우리들교회 와서 양육받고 좋은 일이 생기는가 했더니 상으로 유방암이 걸리셨다. 그런데 양육 강사님이 유방암 걸렸는데 “사모님이 깨어지시면 교회 부흥이 올거에요”라고 하신 말씀이 치료 기간 중 종종 생각났다. 또 한 분은 사랑해주지 않았던 남편 때문에, 같이 사는 시부모님 목사님과 사는데, 직설적이고 강한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육을 받으면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본인이 속인 자라는 걸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셨다. 또 한 분은 미국 유학할 때 방탕하게 음주가무를 즐겼다. 저는 제 인생의 주인공이 저인 줄 알고 살았다. 미국물을 오래 먹고 치과의사가 되었다. 저에게 한국 사모로 사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남편은 착한아이증후군에 연예인병이 중증이라 맨날 성도편만 들어서 우울과 분노가 커졌다. 시도 때도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랐고 안되면 문신을 새기겠다고 하며 성도들 겁주고 싶다고 협박했다. 아무것도 모르며 죄를 짓던 저에게 남편도 가족들도 모두 기다려주었다. 또 한 분은 셋째의 낙태를 반대한 남편 목사와의 부부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고 생명을 살리러간 선교지에서 또다시 생명을 죽인 제 자신에게 절망하여 죽고 싶은 나날을 보냈다. 그때부터 5, 3살된 아이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정서적 학대를 하며 지옥을 살게했다. 그런데다가 인정을 받고자 아이들을 입시지옥까지 내몰았는데, 간증하겠다고 아이들에게 들려줬더니 딸이 “나는 수년간 얼마나 맞았는데 어떻게 엄마는 그 학대를 단3초간에 끝낼 수 있어?” 했다고 한다. 3년 전에 입시를 해서 아들을 유학보냈는데, 친구가 같은방 룸메이트를 칼로 찔러 살해하며 살인자가 되어 아들은 살인자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버렸다. 그동안 공부를 잘해 청년부 회장까지 한 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 그로인해 PTSD로 심각한 학업장애, 우울, 공황장애까지 겪으면서도 휴학을 했어도 집이 지옥같아서 집에 오기 싫어 버텼다는 것을 한참 지나서 말해주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목세 때는 이혼하고 죽고 싶었던 제가 살아나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는데, 이번 20회 목세 때는 우울과 공황으로 죽고 싶었던 아들과 같이오게 하셔서 살아나게 하시니 목세의 최대 수혜자임이 확실하다. 아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텐데 말씀은 너무나 놀라와서 아들이 회복되고 해석되었다.

## 2.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그러므로” 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 기적같은 회복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라는 말이다.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가 따라온다. 어떤 결과인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32, 33절에서 반복된다.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이루지 못한다고 하신다. 포위하고 있지만 도착하지도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세계최강 앗수르 군대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서 점령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들도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화살을 쏘지 못한다. 공격 개시를 못한다는 것이다. 옛날 전쟁에서는 화살이 공격을 시작하는 무기였다. 누구도 막지 못하던 앗수르의 화살인데 예루살렘으로는 발사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어떤 군대의 공격도 다 막아내던 방패인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세우지도 못한다. 세상의 유명한 유세들도 다 뛰어넘어 치던 앗수르군의 토성인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쌓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앗수르 군사들이 단 한 발자국도 예루살렘 성읍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들이 쏘는 화살 하나도 성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 하신다. 그게 다가 아니다. 앗수르 군대는 공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던 길로 돌아간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히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따라오는 결과이다. 끊임없이 사탄에게 노출되어 있지만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다.

34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자체가 지킬 힘을 갖추는 것이다. 스스로 힘이 없으면 적군이 오지 않아도 스스로 망하는 망하는 법이다. 지금 예루살렘은 히스기야가 아무리 대단한 개혁했어도 너무 연약하다. 예루살렘 온백성이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 한 사람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다 보았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하지 않고 그냥 포위만 하고 있어도 저절로 무너질 지경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신다. “보호하리라”만 하셔도 감사한데, “구원하리라”만 하셔도 은혜인데, 둘 다 써서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신다. 누구를? 슬픔과 분노와 원망, 절망에 빠진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신다. “보호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가나는 성경에 딱 7번 쓰였는데 7번 모두 모두 보호하는 대상이 같다. 바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 역시 싸인이고 표지판이고 화살표이다.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과 사람을 가리키는게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바로 교회이다. 바로 우리들이다. ”보호하다”는 말은 날개로 덮듯 방패로 가리듯 담으로 둘러막든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뜻이다. 7개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이 이사야 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 (사31:5)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교회를 향한 모든 공격을 하나님께서 대신 맞아주신다는 뜻이다. **모든 공격을 막아주시는 게 아니라 맞아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욱 귀하게 여겨 지키신다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내 새끼잖아요. 내 새끼를 하나님이 어떻게 안 지키시겠는가? 이 보호의 완성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우리가 받을 징벌과 죽음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다 받으셨다.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같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다. 죄와 사망에서오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셨다. 이렇게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이 보호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 살려주셨다. 이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 아니겠는가? 우리를 보호하신 구원자가 되셨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보호와 구원을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다고 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 보호하여 구원하리라고 하신다. 무슨뜻인가? 조건없이 무조건 보호하여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를 위해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잖아요. 우리가 보호받을 만하면 보호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릴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베푸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윗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은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신다는 뜻이다. 그 후손이 어떠하든지, 지금 여기있는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모든 성도 대표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우리를 반드시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 앗수르의 산헤립도, 그보다 더한 누구든, 네로든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모택동이든 김일성이든 그 어떤 독재자 박해자도 교회를 건드리지 못한다. 예루살렘, 교회를 건드리지 못한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자기 자녀들을 보호하여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지금 앗수르 왕 산헤립같은 사람과 사건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습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절망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자고 성도이기에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줄 믿는다. 하나님이 절대 보호하여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가 원수 갚으면 안되고, 하나님이 대신 맞아주신다. 우리는 영적전쟁에 늘 노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사단을 결박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대단한 사자가 묶여있는데도 으르렁 할 때마다 놀란다.

목양 역사가 중동에서 유럽으로 건너갔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미련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늘” 그러잖아요. 양은 10시 쯤에 풀 뜯어 먹고 새김질을 해야한다. 우리도 말씀 먹고 새김질해야 한다. 군대 생활처럼 여러 마리가 같이 다닌다. 양은 누워서 풀을 뜯지 않는다. 누울 수 없는 양들은 쫓기고 여유가 없어서 겁이 많다고 한다. 몸이 둔하고 뿔이 있어도 소용없고 토끼만 튀어나와도 놀라고 한 마리만 뛰어도 수백 마리가 같이 뛴다고 한다. 주를 위하여 살리라 해도 우리가 겁이 많다. 양은 공포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누울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한번 뒤집어지면 절대로 자기 힘으로 일어나질 못한다.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그게 양이 뒤집어진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양은 뒤집어지면 못 일어나니 낙망이 전공이다. 가장 결정적인 여우. 여우가 양 앞에서 부리는 재주가 희한해서 목자도 여우 쫓다가 구경까지 한다고.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돌담을 통해 따로 수용하는데 그안에는 아주 좋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여우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이른 새벽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 내려온다. 차근차근 내려오기에 여우가 양들이 전혀 관심없다고 생각하도록 내려오다가 가속이 붙어 담장에 딱 올라붙는다고 한다. 우로 좌로 관찰하다가 또 가만히 있는다. 어찌나 여유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 누군가 여우의 존재를 알아보고 어수선해질 때 공격한다. 양들이 어쩔 줄 몰라할 때 반대 저편으로 간다. 그리고 양을 뺑뺑이 돌린다. 그런데 여우가 가만히 있으면 양도 가만히 있는다고. 양이 아둔하고 길도 모르고 눈으로 보면 우리가 360도를 보는데 양은 자기 코앞만 집중해서 본다. 그래서 시선이 산만하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딴데로 시선을 두는 것과 같다. 진짜 코 앞만 보기에 ’여기 풀이 있구나’만 하다가 길잃는 게 양이다. 여우가 뺑뺑이 돌리고 골릴 대로 골리다가 서있으면 양중에 약하고 강한 것이 딱 드러난다고 한다. 그러면 자기가 찍은 양을 딱 죽인다고. 자기새끼 먹이려고 물고간다는데 한 번 그러면 초장지를 바꿔야 한다고 한다. 소 잃고 외양간은 고치는 게 맞다. 그래서 한여름에 여우 한 마리가 양을 300마리까지 죽이는 걸 보았다고 한다. 배고파서 죽이는 게 아니라 골리느라 죽인다고 한다. 악한 세력이 이렇게 무섭다. 목자는 어디로 갔는가? 새벽에 장총 매고 여우 죽이려고 기다린다. 죽이기도 하고 도망도 가게 하고 죽여서 걸어놓기도 한다. 양들 입장에서는 목자가 안 보이니 없는 것과 같다.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주고 한 순간에 여우의 존재가 사라지게 하는데. 목자가 안 보인다고 안중에도 없고 평소에는 신뢰하는 것 같아도 딱 안 보이면 얼마나 신뢰가 약한 지를 보여준다고 한다. 우리도 어렵고 무서운 여우의 일만 들어오지, 그 여우를 더 노려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못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약한 양, 강한 양의 차이가 거기에 있다. 여호와의 열심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고 활을 쏘지 못하고 방패를 세우지도 못하며 토성을 쌓지 못하게 하시는 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미련하여 다 양같아서 다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한다. 양이 딱 우리가 아닌가?

**적용질문2
내 것 아닌 것을 차지하려고 앗수르처럼 돌진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처럼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택자임을 믿습니까?**

## 3. 이 밤에 말씀대로 역전하신다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예루살렘을 보호하여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임한 그 밤에 하나님은 즉시 말씀대로 이루신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밤에 천사 한 명을 보내니까 앗수르 군사 18만 5천을 치셨다. 세계를 주무르던 18만 5천의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시체로 변했다. 랍사게 말만 듣고도 무서워서 한 말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던 예루살렘 백성이다. 산헤립 편지 한 통 받고 나라 망했다며 절망하던 백성이다. 그런데 히스기야 한사람이 산헤립 때문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으셨다. 말씀으로 응답하시고 바로 그날 밤에 말씀대로 앗수르 군대를 다 저 세상으로 다 날려보내신다. 앗수르가 자기 힘을 믿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으려 하니까 하나님이 바로 응징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다. 산헤립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는 밤을 지날 때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펼쳐서 아뢰면, 내 기도 듣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바로 그 밤에 말씀대로 상황을 바꿔주신다. 역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역전을 앗수르 왕 산헤립도 피하지 못한다.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미 7절에 말씀하셨다.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하리라” 하셨다. 이제 이 말씀 그대로 산헤립에게 이루어졌다. 하룻 밤새 모든 군대를 잃은 산헤립은 말씀대로 앗수르 본국으로 돌아갔다. 왔던 길로 돌아갔다. 어찌보면 산헤립은 18만 5천이 죽던 그날 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밤은 우리가 원하고 개입하는 시간이 아니다. 이 밤은 하나님의 시간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이다. 산헤립에게도 이 밤이 불현듯 찾아왔다. 18만 5천이 죽은 날은 안 죽었는데 돌아가서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칼에 죽었다. 그런데 역대기를 보면,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은 놀랍게도 산헤립의 아들이었다. 온세상의 주인행세하던 산헤립, 이 세상에 감히 자기에게 반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신했던 산헤립이 결국 자기 아들의 손에 죽은 것이다. 이런 역전이 없다. 하루 아침에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산헤립은 앗수르 최고의 신에 경배해도 신들의 이름을 붙여준 아들들에게 죽임당한 것이다. 세상 세력은 그러니까 무서워할 게 없다. 열왕기서에 보면 자식이 모반하는 것으로 징계하시는 걸 종종 보잖아요. 믿어도 안 믿어도 자식이 우상이기에 잘못 살면 자식으로 치시는 것이 가장 빠른 길 같다. 출애굽할 때도 바로의 장자를 치시니 금세 내보내줬죠. 그렇게 자식이 배반해도 내 자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또 그 자리에 내 마지막 자식을 세운다. 마지막 아들 엣살핫돈을 또 세우는 것이다. 진짜 자식을 객관적으로 못 본다. 지역 감정이 다 내 자식, 내 고향에서 못벗어난다. 사실 산헤립에게 18만 5천의 군대가 순식간에 송장된 그 밤의 사건은 산헤립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왔던 길로 돌이키는 게 아니라 진짜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산헤립에게는 18만 5천이 죽어도 아직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남아있는 것이다. 돌아가 편하게 거할 니느웨가 남아있었고 궁궐이 남아있었다. 큰 고난을 당하고도 아직 세상에 기댈 것이 있었기에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는다. 문제가 아무리 생겨도 나아오지 않는다. 죄악에 물든 인생을 스스로 뒤집어 회개해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살아나는 진정한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데, 산헤립은 그저 왔던 길로 돌아가 자기가 살던 대로 편하게 사니까 결국은 가장 믿었던 아들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우리 인생이 한 뼘이라고 했다. 밑동 잘린 나무다. 이걸 모르니 악을 행하기에 담대한 것이다. 이 세상의 시간으로만 해석하니까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고 우리는 또 너무 분해서 죽는다. 반면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은 죽다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세상에서 기댈 곳 하나 남지 않아 그저 하나님만 바라봐야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어 기도했기에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된 줄 믿는다. 남북이 이렇게 반역을 일으켜 북이스라엘은 나갔다. 끝까지 악만 행하는 북이스라엘은 승승장구하고 잘산다. 남유다는 맨날 지리멸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자이기 때문에 남유다에서는 그래도 개혁이 몇 번 일어난다. 그 개혁을 할 때 그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 이걸 구속사로 해석해야 한다. 눈앞의 시간으로 자꾸 해석하니까 다 분해서 못 자고 너무 좋아서 못 잔다. 이 역전이 바로 하나님이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인생의 결론이다.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
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슥 12:8)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 그 보호하심을 받으면 약한 자가 다윗처럼 되고 하나님같이 되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천사같이 되는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역전이 있기 때문에 성도는 시간 속에서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면 안된다. 이 세상의 시간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오늘 이 순간이 캄캄한 밤같고 1초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가운데 절망하지만 반드시 하나님의 역전이 있기 때문에 시간 밖에서, 영원 아래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밤과 같은 고난이 오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방패 아래로 도망해야 한다. 내 방패 믿지 말고, 세상의 방패 찾지 말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주에는 성령이 탄식하는 기도를 했고 앞날을 내다봤기 때문에 대선 후에 이렇게 기도회를 했다. 정말 우리는 이 밤과 같은 고난이 왔을 때 즉시 하나님의 방패 아래로 들어가 기도했다고 믿는다. 언제나 하나님의 방패 아래 구원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말씀과 기도밖에 더 있겠는가? 하나님의 방패 아래로, 날개 아래로 나아가야 하는 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줄 믿는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이다. 이땅에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생일이다. 지금까지 역사에 교회를 향한 무수한 핍박과 방해가 이어졌지만 성령께서 그 날개로 덮으시고 방패로 가리셔서 우리의 교회를 지켜주신 줄 믿는다. 어떤 탄압도 여호와의 열심보다 뜨겁지는 못했다. 눈으로 바라보는 사건만 보니 죽을것같지만 구원받은 우리는 누구도 죽일 수 없는 줄 믿는다. 그래서 어떤 세력도 주의 몸된 교회를 건드리지 못했다. 다 없어져 버릴 위기 가운데서도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역전하여 항상 교회를 살려주셨다. 지금 북한에도 남아있는 7천명이 있는 줄 믿는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줄 믿는다. 제가 우리들교회 결혼이야기할 때 남자고 여자면 결혼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북한에 갔더니 네 아들, 내 딸 결혼시키자 약속한다. 시간이 흘러서 보니 영양실조에 곱추고 그래도 다 약속했으니 결혼시킨다. 명맥을 이어가려고… 그러니 우리는 남자고 여자면 다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얼마나 급하신지 우리들 청년들이 이혼을 안 하게 하신다. 보호하여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로 인도되어 들어왔기때문에 성령께서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다. 청년들이 어려서부터 예수믿고 그랬기에 있는 모습 그대로 듣기에 결혼이 잘 되고 이혼을 안 하는 것이다. 진심을 보시고 이나라, 생명이 이어져가야 하기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많이 낳는 것이다. 보호하여 구원하리라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는다. 믿음만 보면 된다. 하지만 우리 가족, 이웃 가운데 아직 보호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번 주 정말 마지막 시간이라 생각하며 초청하시길 바란다. 창립 22주년 전도축제.

**적용질문3
여전히 꿈꾸는 인생역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높음을 자랑하거나 낮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의 역전이 내 삶에 임했습니까?
다음 주일에 누구를 초청하여 모셔오겠는가?**

나눔
저는 불편한 사람이었다. 기준이 뚜렷하거나 게으르게 사는 사람은 인생의 쓰레기처럼 여겼다. 아내와도 재혼으로 관계가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아내의 갑작스러운 자살시도를 겪으며 완전히 무너졌다. 하나님이 저를 완전히 깨트리셨다. 그때 목사님이 죄를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 말이 절 해석하게 해주셨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구나.’ 너무 아팠지만 말씀이 들리고 회개가 시작되었다. 그 사건 이후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들며 동정이 아니라 애통이 생겼다. 내가 낳은 자녀도 힘든데 남이 낳은 자녀 두 명에, 자기가 낳은 자녀 두 명. 너무 힘들었을거라 생각되었다. 저는 집에 들어가서 드라마 보고 있는 아내가 너무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며 깨울까 걱정되고, 드라마 보고 있으면 같이 봐준다. 아내도 말씀을 통해 ‘요셉의 존재 자체가 형들에게 가해자였겠구나’ 하며 ‘내가 새엄마인 자체가 애들에겐 상처이겠구나’ 생각하며 큰아들에게 눈물로 사과했더니 아들이 펄쩍뛰며 친구 만나러 가는것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눌려있었는지 깨달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그 일이 꼭 필요했던 사건이었다. 깨어지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시고 말씀으로 살게하신 것이니까. 유책사유가 아내에게 있으니 양육권 다 가지고와 남편이 잘 키웠는데 밤에 게임한다고 때렸더니 당장 믿지도 않던 친엄마에게 가버렸다. 그러니까 이혼하지 않아야하는데 그럼에도 재혼할거면 말씀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의 고백과 공동체가 있어야 그나마 버텨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안 생기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계속 생길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게임하고 나쁜짓하려니까 안 믿는 친엄마를 당장 찾아가잖요. 아무리 잘해줘도 잘해주는것 자체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뜻이다. 잘해준다는 언어 자체가 이상한 말이다. 욕하고 때리고 맘대로하고 살아야 하는데 자고로 새엄마는 때리는거 안한다. 항상 교양있게 나가는게 아이들을 나가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다시 한번 말하노니, 유책사유가 아내 남편에게 있던 무조건 결혼은 지켜야한다. 하나님께서 그러나 그 중심을 보시고 반드시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약속이 이루어질 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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